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ReadingLog] 루돌프 불트만의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이 책의 본명은 우르크리스텐툼이며 부제는 서양고대사상 영역에서라고 한다.
독일어 표제로는 <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 ,1969>

제목의 초대교회의 의미는 신약성서를 의미하는 것인데, 신약성서 안에 들어있는 세계관은 5가지이다.
 1) 구약성서적 유산(하나님-세계-민족-인간으로 이어지는)
 2) 유대교(회당과 율법, 헬레니즘 유대교)
 3) 그리스적 유산(폴리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4) 헬레니즘(스토아적 이상, 성신종교, 밀의종교, 영지주의)
 5) 초대기독교(절충주의현상, 세계내에서의 인간의 상황, 구원)

이런 관점이 신약성서를 이루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특정한 시간(역사 안에서)과 공간(사회 그리고 문화)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보이셨다.

 성서가 씌여지고 정경화되기까지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판단이 영향을 주었는가?"하는 생각과 함께 그때 씌여진 성서는 "오늘날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 것일까?"하며 자문하게 된다.

특히 인상깊은 내용들 간략히 발췌(이하 내용)
1. 하나님과 세계
1) 하나님 인식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걸어 올 때에만 그에 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들음"이다.- 들음은 거리를 제거하면서 해후되는 앎이며 말하는 자의 요구에 대한 승인이다.- 하나님인식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Wesen)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뜻에 관한 것이며 그 뜻을 아는 것은 그를 승인하는 것을 뜻한다. 구약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원래 명제 및 인식의 진리가 아니라 승인을 요구하는 -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요구를 앎이다. - 곧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것이다. 그것의 요구와 운명에서 해후되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경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배제한다.

2)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
 경건한 자는 고난은 언제나 개인의 고난이라는 것과 고난을 당하는 개인은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개인이 전체로부터 그리고 전체 안에서 이해됨으로써 그에게서 짐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와 같이 '전체를 보라'는 충고가 없다. 회의와 불안은, 모든 개체는 합리적 통찰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 상황에서 떠나서 전체를 관망하고 일반적인 것의 어떤 한 경우로 자신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어진 것에서 찾아질 수 없다면 오고 있는 것(das Kommende)에서 해후될 것이다.
 (욥기의 예를 들다가) 하나님의 전능은 한계가 없고 하나님의 외관상의 횡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오직 침묵만이 남을 뿐이다. 여기서 구약적 하나님 신앙 일반에 포함되어 있는 주제, 즉 알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주제가 극단적으로 발전되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뜻과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을 떄 바로 하나님은 구원의 미래를 일으킨다는 신뢰와도 결합될 수 있는 자기포기의 주제가 발전되었다. 여기에서 특유한 신앙개념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사실로 여기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겸손한 복종에서, 조용한 기다림에서 그를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에서 요구하는 자로서, 축복하는 자로서, 심판하는 자로서 만난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미래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언제나 오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오고 있는 자(der Kommende)로서 지금 여기의 모든 것에 대해 피안적이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구약적 의미에서는 사물, 즉 감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정신의 피안성도, 생멸의 세계에 대한 이념 세계의 피안성도 아니다.

2. 하나님과 인간
 육과 마찬가지로 생명도 무상한 것이고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영혼불멸사상은 구약에는 없다. 이 사상은 후에 그리스 문화권에서 헬레니즘적 유대교에 침투된 것이다. 반면 몸의 부활 관념은 이란 종교에서부터 팔레스틴 유대교로 침투해 왔다. 이 관념은 구약에서는 후기에 기록된 몇 부분에서만 볼 수 있다. 구약은 인간 생활 장소로서 오직 이 지상을 알 뿐이고 죽은 자들은 망령으로서 지하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죽음이 모두 죄에 대한 벌이라는 사상 또한 구약에는 없다. 아담의 범행에 대한 벌은 죽음이 아니라 낙원에서의 추방이고 노동의 괴로움이었다.
 구약은 삶을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오직 생명으로서만, 정신적 현상이 아니라 오직 생동적인 것(vital)으로서만 알고 있다.
-인간을 어떤 이상형에 의해 빚어 만들 수 있는 예술품으로 보지 않았다.

 -죄와 은혜에 대해
 옛 이스라엘은 단지 이 세상 안에서의 삶만을 알고 죽음 후의 미래를 단지 민족의 미래로서만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운이 행복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개인의 불행과 민족수난과 죄의 항구성이 경험에서 입증되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대한 희망은 "종말적 희망"으로 변했다."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렘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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