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면도날을 사러 가게로 향했다.
비가 내린 도로위로
가로등 불빛이 거멓고 희멀건 바람으로
아스팔트 위를
촉촉하게 젖어든다.
싸락눈 몇 송이가 나부낀다.
눈가루는 불안하고
우울하게
바람을 탄다.
나는 기형도
그이가 떠오른다.
자연의 비유에서
자신을 조금이나마
우울하고
아름답게 열어주었던 순수한 청춘!
이런 날에는 왠지
나의 이십대가 떠오른다.
근데 이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건지?
이 바람따라 생겨나는 눈들은
겨울의 눈물인가?
내 마음에 박힌
얼음인가?
딸아이의 과자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종종걸음으로...
훨씬 편안한 걸음으로...
審心풀離-Pastime
2012년 12월 3일 월요일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ReadingLog]루돌프 불트만의 예수그리스도와 신화(Jesus Christ and Mythology)
본서는 영어판본(Jesus Christ and Mythology,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58)이 원본이고, 독일어판이 번역본이라고 한다.
책의 목차를 보면
1. 예수의 메시지와 신화의 문제(The Message of Jesus and the problem of Mythology)
2. 신화적 종말론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Mythological Eschatology)
3.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현대의 세계관(The Christian Message and the Modern World-view)
4. 현대의 성서해석과 실존주의 철학(Modern Biblical Interpretation and Existentalist Philosophy)
5. 행동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의미(The Meaning of God as Acting)
100page 남짓되는 책인데, 불트만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다.
5살짜리 둘째딸 다은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천국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거죠?"
"글쎄, 우리 마음 속이라~"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내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면, 나는 매우 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답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천국은 사후에 가는 하나님의 세계인가?
천국은 살아있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세계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려본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복음 6장 9절~10절)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 내재하거나 세상 역사의 일부로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론적인(eschatological)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인 질서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에 갑작스럽게 종말을 도래케 하실 것이며 영원한 축복의 세계로서 새로운 세계를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Johannes Weiss, Die Predigt Jesu von Reiche Cottes, 1892,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라는 책에서 주장된 내용)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와 동일한 의미로서 이해했다. 초대 공동체는 또한 임박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가복음 9:1)"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동일한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역사는 계속 되고 있었다. 역사의 계속되는 진행은 신화를 부정해버렸다.
신화의 역할로 초월적 실재들에게 역사내재적이며 세상적인 객관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즉, 신화는 피안적인 것(Jenseitig)을 차안적인 것(Diesseitigen)으로 객관화시킨다.
다시금 천국에 대해 생각해본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존재가 만나고, 그 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경험적으로 알아간다.
또한 육신의 죽음은 그 신비를 신비로서가 아니라
실재와 축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런 길이리라.
그렇다면 "천국은 우리들 마음에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보자.
'천국은 지상 어디에든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다가오심, 말걸어오심, 깨닫게 하심, 그분을 알고 경험케 하심.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하나님 나라를 이 생에서 더욱 경험하게 되고, 그만큼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 아닐까?'
세속에서의 삶의 고단함, 결핍, 절망을 메울 수 있는, 그리고 모든 것의 충족을 가져다주는 그런 욕구충족의 영원한 종합선물세트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이 생에서의 삶의 그러한 조건들 속에 함께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그래서 나는 이것은 취할 것이고 저것은 버릴 것이 아니라, 자족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그 분과 함께 묵묵히 살아가는 삶 -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구나.
책의 목차를 보면
1. 예수의 메시지와 신화의 문제(The Message of Jesus and the problem of Mythology)
2. 신화적 종말론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Mythological Eschatology)
3.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현대의 세계관(The Christian Message and the Modern World-view)
4. 현대의 성서해석과 실존주의 철학(Modern Biblical Interpretation and Existentalist Philosophy)
5. 행동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의미(The Meaning of God as Acting)
100page 남짓되는 책인데, 불트만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다.
5살짜리 둘째딸 다은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천국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거죠?"
"글쎄, 우리 마음 속이라~"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내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면, 나는 매우 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답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천국은 사후에 가는 하나님의 세계인가?
천국은 살아있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세계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려본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복음 6장 9절~10절)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 내재하거나 세상 역사의 일부로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론적인(eschatological)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인 질서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에 갑작스럽게 종말을 도래케 하실 것이며 영원한 축복의 세계로서 새로운 세계를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Johannes Weiss, Die Predigt Jesu von Reiche Cottes, 1892,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라는 책에서 주장된 내용)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와 동일한 의미로서 이해했다. 초대 공동체는 또한 임박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가복음 9:1)"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동일한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역사는 계속 되고 있었다. 역사의 계속되는 진행은 신화를 부정해버렸다.
신화의 역할로 초월적 실재들에게 역사내재적이며 세상적인 객관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즉, 신화는 피안적인 것(Jenseitig)을 차안적인 것(Diesseitigen)으로 객관화시킨다.
다시금 천국에 대해 생각해본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존재가 만나고, 그 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경험적으로 알아간다.
또한 육신의 죽음은 그 신비를 신비로서가 아니라
실재와 축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런 길이리라.
그렇다면 "천국은 우리들 마음에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보자.
'천국은 지상 어디에든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다가오심, 말걸어오심, 깨닫게 하심, 그분을 알고 경험케 하심.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하나님 나라를 이 생에서 더욱 경험하게 되고, 그만큼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 아닐까?'
세속에서의 삶의 고단함, 결핍, 절망을 메울 수 있는, 그리고 모든 것의 충족을 가져다주는 그런 욕구충족의 영원한 종합선물세트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이 생에서의 삶의 그러한 조건들 속에 함께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그래서 나는 이것은 취할 것이고 저것은 버릴 것이 아니라, 자족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그 분과 함께 묵묵히 살아가는 삶 -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구나.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지난 5년간 독서를 돌아보면서
관심두고 봐 왔던 책들의 저자를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면,
1. 프란시스 쉐퍼(Francis Shaeffer,1912-84, 기독교 세계관)
2. C.S 루이스(C.S. Lewis)
3.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과 쟝 바니에(Jean Vanier,1928~)
4.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5.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wards, 1703-1758)
6.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
7. 청교도 저작들(Puritan's works)
대표적으로는 1)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2)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
8.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9. 칼 바르트(Karl Barth,1866-1968)
11.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1884-1976)
12.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1926-)
13.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1886-1965)
1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15. 도르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 )
- 그 외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 - 성서신학 구약학
한스 큉(Hans Küng, 1928~ )
16. 교회사 또는 기독교 사상사
후스토 곤잘레스 (Justo L. Gonzalez)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7. 기독교 교육
존 반 다이크(John Van Dyck)
18.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
19. 다석 류영모(1890-1981)
20. 무위당 장일순(1928-1994)
21. 함석헌(1901-1989)
22. 대천덕 신부(Ruben Archer Torrey Ⅲ, 1918-2002)
이따금, 서양철학사(Johannes Hirschberger저 강성위 역)를 참고하고 동양고전에 관심을 두었다.
틈 나는대로 5년간 읽었던 책을 Reading Log형식으로 올려보고자 한다. 글을 읽기만 하는 것보다 생각을 정리하며 써가며 읽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1. 프란시스 쉐퍼(Francis Shaeffer,1912-84, 기독교 세계관)
2. C.S 루이스(C.S. Lewis)
3.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과 쟝 바니에(Jean Vanier,1928~)
4.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5.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wards, 1703-1758)
6.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
7. 청교도 저작들(Puritan's works)
대표적으로는 1)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2)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
8.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9. 칼 바르트(Karl Barth,1866-1968)
11.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1884-1976)
12.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1926-)
13.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1886-1965)
1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15. 도르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 )
- 그 외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 - 성서신학 구약학
한스 큉(Hans Küng, 1928~ )
16. 교회사 또는 기독교 사상사
후스토 곤잘레스 (Justo L. Gonzalez)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7. 기독교 교육
존 반 다이크(John Van Dyck)
18.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
19. 다석 류영모(1890-1981)
20. 무위당 장일순(1928-1994)
21. 함석헌(1901-1989)
22. 대천덕 신부(Ruben Archer Torrey Ⅲ, 1918-2002)
이따금, 서양철학사(Johannes Hirschberger저 강성위 역)를 참고하고 동양고전에 관심을 두었다.
틈 나는대로 5년간 읽었던 책을 Reading Log형식으로 올려보고자 한다. 글을 읽기만 하는 것보다 생각을 정리하며 써가며 읽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ReadingLog] 루돌프 불트만의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이 책의 본명은 우르크리스텐툼이며 부제는 서양고대사상 영역에서라고 한다.
독일어 표제로는 <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 ,1969>
제목의 초대교회의 의미는 신약성서를 의미하는 것인데, 신약성서 안에 들어있는 세계관은 5가지이다.
1) 구약성서적 유산(하나님-세계-민족-인간으로 이어지는)
2) 유대교(회당과 율법, 헬레니즘 유대교)
3) 그리스적 유산(폴리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4) 헬레니즘(스토아적 이상, 성신종교, 밀의종교, 영지주의)
5) 초대기독교(절충주의현상, 세계내에서의 인간의 상황, 구원)
이런 관점이 신약성서를 이루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특정한 시간(역사 안에서)과 공간(사회 그리고 문화)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보이셨다.
성서가 씌여지고 정경화되기까지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판단이 영향을 주었는가?"하는 생각과 함께 그때 씌여진 성서는 "오늘날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 것일까?"하며 자문하게 된다.
특히 인상깊은 내용들 간략히 발췌(이하 내용)
1. 하나님과 세계
1) 하나님 인식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걸어 올 때에만 그에 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들음"이다.- 들음은 거리를 제거하면서 해후되는 앎이며 말하는 자의 요구에 대한 승인이다.- 하나님인식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Wesen)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뜻에 관한 것이며 그 뜻을 아는 것은 그를 승인하는 것을 뜻한다. 구약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원래 명제 및 인식의 진리가 아니라 승인을 요구하는 -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요구를 앎이다. - 곧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것이다. 그것의 요구와 운명에서 해후되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경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배제한다.
2)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
경건한 자는 고난은 언제나 개인의 고난이라는 것과 고난을 당하는 개인은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개인이 전체로부터 그리고 전체 안에서 이해됨으로써 그에게서 짐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와 같이 '전체를 보라'는 충고가 없다. 회의와 불안은, 모든 개체는 합리적 통찰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 상황에서 떠나서 전체를 관망하고 일반적인 것의 어떤 한 경우로 자신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어진 것에서 찾아질 수 없다면 오고 있는 것(das Kommende)에서 해후될 것이다.
(욥기의 예를 들다가) 하나님의 전능은 한계가 없고 하나님의 외관상의 횡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오직 침묵만이 남을 뿐이다. 여기서 구약적 하나님 신앙 일반에 포함되어 있는 주제, 즉 알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주제가 극단적으로 발전되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뜻과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을 떄 바로 하나님은 구원의 미래를 일으킨다는 신뢰와도 결합될 수 있는 자기포기의 주제가 발전되었다. 여기에서 특유한 신앙개념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사실로 여기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겸손한 복종에서, 조용한 기다림에서 그를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에서 요구하는 자로서, 축복하는 자로서, 심판하는 자로서 만난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미래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언제나 오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오고 있는 자(der Kommende)로서 지금 여기의 모든 것에 대해 피안적이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구약적 의미에서는 사물, 즉 감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정신의 피안성도, 생멸의 세계에 대한 이념 세계의 피안성도 아니다.
2. 하나님과 인간
육과 마찬가지로 생명도 무상한 것이고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영혼불멸사상은 구약에는 없다. 이 사상은 후에 그리스 문화권에서 헬레니즘적 유대교에 침투된 것이다. 반면 몸의 부활 관념은 이란 종교에서부터 팔레스틴 유대교로 침투해 왔다. 이 관념은 구약에서는 후기에 기록된 몇 부분에서만 볼 수 있다. 구약은 인간 생활 장소로서 오직 이 지상을 알 뿐이고 죽은 자들은 망령으로서 지하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죽음이 모두 죄에 대한 벌이라는 사상 또한 구약에는 없다. 아담의 범행에 대한 벌은 죽음이 아니라 낙원에서의 추방이고 노동의 괴로움이었다.
구약은 삶을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오직 생명으로서만, 정신적 현상이 아니라 오직 생동적인 것(vital)으로서만 알고 있다.
-인간을 어떤 이상형에 의해 빚어 만들 수 있는 예술품으로 보지 않았다.
-죄와 은혜에 대해
옛 이스라엘은 단지 이 세상 안에서의 삶만을 알고 죽음 후의 미래를 단지 민족의 미래로서만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운이 행복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개인의 불행과 민족수난과 죄의 항구성이 경험에서 입증되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대한 희망은 "종말적 희망"으로 변했다."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렘50:20)
독일어 표제로는 <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 ,1969>
제목의 초대교회의 의미는 신약성서를 의미하는 것인데, 신약성서 안에 들어있는 세계관은 5가지이다.
1) 구약성서적 유산(하나님-세계-민족-인간으로 이어지는)
2) 유대교(회당과 율법, 헬레니즘 유대교)
3) 그리스적 유산(폴리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4) 헬레니즘(스토아적 이상, 성신종교, 밀의종교, 영지주의)
5) 초대기독교(절충주의현상, 세계내에서의 인간의 상황, 구원)
이런 관점이 신약성서를 이루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특정한 시간(역사 안에서)과 공간(사회 그리고 문화)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보이셨다.
성서가 씌여지고 정경화되기까지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판단이 영향을 주었는가?"하는 생각과 함께 그때 씌여진 성서는 "오늘날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 것일까?"하며 자문하게 된다.
특히 인상깊은 내용들 간략히 발췌(이하 내용)
1. 하나님과 세계
1) 하나님 인식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걸어 올 때에만 그에 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들음"이다.- 들음은 거리를 제거하면서 해후되는 앎이며 말하는 자의 요구에 대한 승인이다.- 하나님인식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Wesen)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뜻에 관한 것이며 그 뜻을 아는 것은 그를 승인하는 것을 뜻한다. 구약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원래 명제 및 인식의 진리가 아니라 승인을 요구하는 -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요구를 앎이다. - 곧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것이다. 그것의 요구와 운명에서 해후되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경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배제한다.
2)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
경건한 자는 고난은 언제나 개인의 고난이라는 것과 고난을 당하는 개인은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개인이 전체로부터 그리고 전체 안에서 이해됨으로써 그에게서 짐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와 같이 '전체를 보라'는 충고가 없다. 회의와 불안은, 모든 개체는 합리적 통찰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 상황에서 떠나서 전체를 관망하고 일반적인 것의 어떤 한 경우로 자신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어진 것에서 찾아질 수 없다면 오고 있는 것(das Kommende)에서 해후될 것이다.
(욥기의 예를 들다가) 하나님의 전능은 한계가 없고 하나님의 외관상의 횡포로 나타나는 지혜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오직 침묵만이 남을 뿐이다. 여기서 구약적 하나님 신앙 일반에 포함되어 있는 주제, 즉 알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주제가 극단적으로 발전되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뜻과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을 떄 바로 하나님은 구원의 미래를 일으킨다는 신뢰와도 결합될 수 있는 자기포기의 주제가 발전되었다. 여기에서 특유한 신앙개념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사실로 여기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겸손한 복종에서, 조용한 기다림에서 그를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에서 요구하는 자로서, 축복하는 자로서, 심판하는 자로서 만난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미래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언제나 오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오고 있는 자(der Kommende)로서 지금 여기의 모든 것에 대해 피안적이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구약적 의미에서는 사물, 즉 감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정신의 피안성도, 생멸의 세계에 대한 이념 세계의 피안성도 아니다.
2. 하나님과 인간
육과 마찬가지로 생명도 무상한 것이고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영혼불멸사상은 구약에는 없다. 이 사상은 후에 그리스 문화권에서 헬레니즘적 유대교에 침투된 것이다. 반면 몸의 부활 관념은 이란 종교에서부터 팔레스틴 유대교로 침투해 왔다. 이 관념은 구약에서는 후기에 기록된 몇 부분에서만 볼 수 있다. 구약은 인간 생활 장소로서 오직 이 지상을 알 뿐이고 죽은 자들은 망령으로서 지하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죽음이 모두 죄에 대한 벌이라는 사상 또한 구약에는 없다. 아담의 범행에 대한 벌은 죽음이 아니라 낙원에서의 추방이고 노동의 괴로움이었다.
구약은 삶을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오직 생명으로서만, 정신적 현상이 아니라 오직 생동적인 것(vital)으로서만 알고 있다.
-인간을 어떤 이상형에 의해 빚어 만들 수 있는 예술품으로 보지 않았다.
-죄와 은혜에 대해
옛 이스라엘은 단지 이 세상 안에서의 삶만을 알고 죽음 후의 미래를 단지 민족의 미래로서만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운이 행복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개인의 불행과 민족수난과 죄의 항구성이 경험에서 입증되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대한 희망은 "종말적 희망"으로 변했다."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렘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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